[특별 인터뷰] 염승숙, 윤고은 "쓰는 동안 입은요?"
『소설가의 마감식 : 내일은 완성할 거라는 착각』 염승숙, 윤고은 소설가 특별 인터뷰
마감식을 주제로 글을 쓰면서 정말 마감 압박으로 고통받다니, 이거야말로 진정한 메타마감이 아닌가 생각했어요. (2023.06.08)
두 분 오랜만입니다! 서면으로나마 뵙게 되어 정말 반갑습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고 계신지 근황부터 여쭙고 싶어요.
윤고은 : 안녕하세요? 라디오 진행을 하고, <악스트>에 연재했던 장편소설을 다듬고 있어요. 6월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달이라 최대한 많이 누리고 싶은데 금세 날아가버릴 것 같아 벌써 아쉬워요.
염승숙 : 반갑습니다. 저는 늘 변함없는 날들을 보내고 있어서 근황이랄 게 딱히 없긴 한데... 일적으로는 아무래도 학기중이라 강의에 집중하고 있고, 또 여러 단행본의 해설을 맡아서 쓰는 중이에요. 그리고 사적으로는 아이를 기르는 엄마이다 보니, 언제나 정신이 산만하긴 하고요...(웃음) 여름은 또 아이가 부쩍 크는 계절이라, 벌써부터 그 변화에 기쁨과 아쉬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여러 작가의 단편 소설을 모은 앤솔러지 작업이 아닌, 단둘이 쓴 산문집이라니 그간 출간한 책들과는 소회가 많이 다를 것 같아요. 책을 쓰는 과정에서나 책이 나온 이후 있었던 재밌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얘기해주세요.
염승숙 : 소설가로서 앤솔러지에 참여하기도 하지만, 두 명이 쓴 공저는 처음이라 많이 흥미롭고 또 많이 낯설기도 했어요. 소제목을 정하고, 각각의 챕터와 에필로그까지 따로 써서 묶고, 표지와 제목을 고민하는 '함께'의 과정이 외롭지 않아서 좋았습니다. 딱히 재밌는 에피소드라기보다는... 매주 번갈아가며 쓴 에세이를 채팅방에서 공유했는데, 똑같은 주제를 두고도 두 사람이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니까 그 사실 자체로 재밌었어요. 알고는 있었지만 아, 정말 다르다 달라, 그런 말을 새삼스레 서로 많이 하며 웃기도 했고요.
윤고은 : 마감식을 주제로 글을 쓰면서 정말 마감 압박으로 고통받다니, 이거야말로 진정한 메타마감이 아닌가 생각했어요. 저는 심지어 이 인터뷰 답변까지 늦게 드리고 있잖아요? 마감식에 대해 쓰기에 전반적으로 아주 적절한 태도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다 변명이지만 정말 마감에 대해 안팎으로 요모조모 많이 생각해본, 즐거운 작업이었어요. 책 출간 후에는 '문학살롱 초고'에서 북토크를 했는데요. 대화 중에 승숙이 모기를 잡았던 게 자꾸 생각나요. 한 시간 반이 넘도록 우리 곁을 맴돌던 그 모기를 북토크가 마무리될 즈음에 승숙이 두 손으로 잡았는데요, 이런 경험이 흔한 건 아니잖아요?
저는 소설 속의 특정 단어나 특정 장면들을 수집하는 걸 좋아하는데, 그중 하나가 '북토크'예요. 소설 속에서 작가와 독자가 만나는 자리를 다룬 페이지를 읽게 되면 따로 메모해둬요. 그래서 말인데, 북토크에서 모기 잡은 작가 얘기는 절대로 흔한 게 아니에요. 머릿속으로 재생할수록 더 웃긴, 괜히 슬며시 웃게 되는 그런 장면들 중 하나예요. 승숙과 제가 처음 만나게 된 자리, 그러니까 한 이십 년 전의 어느 자리에서도 승숙이 모기를 잡았다고 전해지고 있거든요.(제가 그날을 기억하지 못하고 승숙을 통해 들었던지라) 그때도 제가 승숙이 모기를 잘 잡는 것에 감탄했다고 하던데, 이십 년 후 북토크에서도 그 장면이 재현된 셈이죠.
책이 나오기까지의 과정이 궁금합니다. 일단 '마감식'이라는 오묘한 조어 아래 공복, 차, 식탁, 펑크, 작업실, 전투 식량, 냉장고, 만찬까지 총 여덟 개의 키워드를 두고 각각 비슷한 분량의 글을 쓰셨는데요, 이 키워드는 어떻게 정해진 건가요?
윤고은 : 마감식에 대해서 몇 개의 키워드를 정해서 접근해보자, 는 얘기를 오래전부터 함께 해왔고요. 다만, 그 키워드를 무엇으로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조금 막연하게 고민을 하고 있다가 <채널예스>에 연재를 하게 되면서 급히 결정해야 하는 상황이 된 거예요. 저는 다급하면 좀 아이디어가 빠르게 떠오르는 편이라(이것 역시 몹쓸 착각일 수도 있겠죠? 책을 쓰고도 못 고친 착각!) 몇 개의 키워드를 후루룩 정해버렸어요. 그중 맨 처음이 '공복'이었고요. 공복 제안을 하자 승숙도 반겼죠.
우리가 각자 다른 이유에서 공복에 대해 많이 생각하는 사람들이라는 게 재미난 포인트였어요. 같은 키워드에 대해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게 흥미로운 지점이라고 생각했어요. 저는 뭔가에 이름표 붙여주는 걸 좋아하는 편인데요, 키워드에 꼭 '공복'과 '펑크'를 넣고 싶었어요. '펑크식'이라는 건 생각만으로도 흥미롭잖아요. 들었을 때 '펑크식이 뭐지?' 싶을 수도 있지만, 그래서 더 매력적이죠. 그리고 공복부터 만찬까지, 시작과 끝을 정해둔 후 함께 그 사이사이를 채우기 시작했어요.
사실 여덟 개 키워드만 가지고 얘기했지만, 팔십 개까지도 거뜬히 키워드를 정하고 쓸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에요.(팔십 개의 마감은 전혀 거뜬하지 않은 문제지만) "이런 건 어때, 승숙?" 하면 승숙은 "오, 좋은데요!" 할 게 분명하고요. 왜 확신하냐면, 제가 승숙(그러니까 우리!) 취향 저격의 키워드를 잘 골라내니까요, 아니면 유혹할 자신이 있거나.
한 편 한 편 완성한 뒤 서로에게 먼저 보여주었는지, 편집자에게 각각 발송하였는지도 궁금하네요! 어떤 쪽이건 왜 그렇게 하기로 하였는지 이유도 궁금하고요.
염승숙 : <채널예스>에 격주로 에세이를 연재하기로 결정한 이후에 편집자께서 셋이 함께하는 채팅방을 만드셨어요. 그곳에서 주로 소통을 했어요. 원고도 마감일마다 파일로 바로 업로드하고요. 원고 한 꼭지를 쓰면 셋이서 즉각적으로 공유한 셈인데, 무엇보다 번거롭지 않아서 좋았다고 해야 할까요. 책을 같이 만드는 사람끼리는 어떤 전우애랄까, 하는 것이 생기는 탓인지는 몰라도 숨기거나 머뭇거리는 일 없이 서로 의견과 일정을 나눌 수 있어서 편하고 안정적이었어요.
동년배 여성 소설가 두 사람이 마감을 앞두고 무엇을 먹는가, 하는 테마 자체가 흥미롭지 않을 수 없습니다. 책을 읽다 보니 두 분의 사뭇 다른 점들이 이 책을 훨씬 더 재밌고 풍성하게 만들어주는 것 같았어요. 저에게 염승숙 작가님은 '상태'에 관심이 많은 사람, 윤고은 작가님은 '활용'에 관심이 많은 사람으로 다가왔는데요,(웃음) 첫 꼭지 '공복'부터 확연히 드러나지요. 같은 키워드를 두고 염승숙 작가님은 '공복이라는 바로 그 상태'에 집중해 썼고, 윤고은 작가님은 '공복을 활용해 그때 먹는 것'에 집중했어요. 서로의 첫 번째 글을 읽고 어떤 생각을 하셨나요?
윤고은 : '공복'과 '공심'이라니, 그런 연결은 저라면 전혀 하지 못했을 거예요. 제 사전에 아예 '공심'이라는 단어가 없는 것 같아요.(웃음) 역시 같은 키워드로 각자의 이야기를 풀어가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죠. 공복을 대하는 태도나 공복을 바라보는 시각 자체가 다르다는 게 흥미롭게 다가왔으니까요. 우리는 서로 같은 우주복을 입고 전혀 다른 방향의 행성으로 떠난 사람들처럼 보여요. 그래서 이 책이 더 매력적인 하나의 우주를 이루는 것 같고요.
염승숙 : 오래 친밀함을 유지하고 있는 사이니까 서로 어떤 상황인지 대략적으로는 알고 있잖아요. 그래서 첫 챕터였던 '공복'에서 무슨 내용이 나올지 감을 잡기는 했었는데, 역시나 글은 말과는 전혀 달라서 막상 접하니까 새로웠어요. 윤고은 작가님이 눈뜨자마자 뭘 많이 드시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 정도로 많이 먹는지는 몰랐다든가...(웃음) 윤 작가님처럼 포도 한 송이까지는 아니겠지만 나도 아침에 포도 좀 먹어볼까, 생각했지만 바로 단념했습니다.
염승숙 작가님 원고의 키워드 중 '육아'를 빼놓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소설 쓰기는 물론 삶의 패턴을 완전히 뒤바꾼 인생의 사건이라 할 수 있을 텐데요. 아이와 함께하는 삶이 작가님의 글쓰기에 어떤 영향을 주었나요?
염승숙 : 말씀해주신 대로, 아이는 제게 사건 그 자체가 되었죠. 아이와 함께한 이후로는, 이 아이가 없는 삶의 형태를 생각할 수도 없어졌어요. 사건 없는 소설은 있을 수 없잖아요. 그만큼 소중하고 귀한 존재이기에 아이는 저를 기쁘게도, 힘들게도 해요. 부모로서 아이를 먹이고 재우는 일에서 끝나지 않고, 아이가 맞이할 미래를 함께 예비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늘 분주하거든요. 그 시간을 쪼개서 저의 인생도 마땅히 꾸려가야 하니까, 더 깊은 고민에 빠지는 것 같습니다. 아이는 저의 글쓰기에도 당연히 큰 영향을 주고 있어요.
아이를 갖고 또 낳아 기르는 동안 네 번째 소설집 『세계는 읽을 수 없이 아름다워』를 써서 출간했는데, 맨 앞의 면지에 아이의 이름을 적었어요. 소설집에 수록된 일곱 편의 작품 모두가, 아이를 생각하며 쓴 소설들이거든요. 각각의 작품마다, 제가 아이에게 하고 싶은 말들을 숨겨두었어요. 그 뒤로도 여전히, 쓰고 있는 소설들이 동일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지 않나 해요. 세계의 아름다움과 불합리를 편견 없이 발견하고, 자기 안의 실패와 결함을 오롯이 들여다보면서 이해에 도달하고자 애쓰는 삶. 저는 아이의 삶이 그러했으면 좋겠고 저의 글쓰기도 분명히, 그와 다르지 않았으면 합니다.
음식 혹은 식사에 대한 생각도 전과 많이 달라졌을 것 같아요. '먹고 산다'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먹이고 살린다'라는 의미가 더해졌을 것 같은데, 어떠세요?
염승숙 : 아무래도 그렇죠. 에세이에도 썼지만, 저는 아이를 낳고 나서 음식을 해 먹지 않을 자유를 잃었으니까요...(웃음) 아이가 먹을 음식을 만드는 과정이 수련이나 고행처럼 느껴지던 때도 있었는데, 지금은 그래도 아이가 조금 자라고 저도 요령(?)이 늘어서 빠릿빠릿하게 끼니를 해치우기도 합니다. 입이 짧은 아이라서 어떻게든 몸무게를 늘리고 싶은 마음에, 식사시간마다 전쟁을 치르고 있기는 하지만요.
한편, 윤고은 작가님 원고에서는 '왕복 세 시간 출퇴근길'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이동을 최고의 영감으로 삼는 사람"이라고 본인을 설명해주셨습니다만, 요즘은 출퇴근길에 어떤 생각을 하시는지 궁금해요.
윤고은 : 이동을 최고의 영감이라고 표현한 건... 솔직히 말하면 십 분 이동도 이동이에요. 세 시간 이동을 해야만 영감이 떠오르는 건 아니란 얘기죠. 영감은 어쩌면 이 모퉁이에서 다음 모퉁이까지 단 십 분 걸어가는 걸로도 충분히 건질 수 있는 건지도 몰라요. 그러니까 이동이 영감에 끼치는 영향보다는 그 반대 방향이 훨씬 더 절실할 거예요. 몸은 고단해도 뭔가를 주울 수 있다는 희망과 기대와 착각(또 착각? 아니에요. 이건 진짜예요!)이 제 출퇴근길을 조금 특별하게 만들어주니까요.
출근길에 휴대폰으로 짧은 글을 써서 라디오 방송에서 매일매일 읽었던 시절도 있는데, 이야깃거리가 매일 발견된다는 게 너무 놀라웠어요. 심지어 오늘은 이미 건진 아이템이 있으니 이건 내일 써야지, 하고 '킵'해두기까지 했는데, 그다음 날엔 또 강력한 생각이 떠오르는 것도 경험했죠. 여하튼 그 이야기들이 두꺼운 한 권의 산문집으로 출간된 후에도 저는 계속 뭔가를 길에서 줍고 있어요. 그 생각들은 가공 과정을 거쳐서 소설로 가요. 사실은 출퇴근길에 하지 않는 생각을 고르기가 더 빠를지도 모르겠어요.
부모님이나 지인들 혹은 '카페인(윤고은 작가님이 진행중인 라디오 프로그램 청취자 애칭) ' 여러분들이 종종 음식을 보내주시는 것 같아요. 손수 만들거나 기른 음식을 선물받는 건 다른 선물과 또다른 느낌이지요. 최근에 받은 인상적인 음식 선물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윤고은 : 최근은 아니지만, 제가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윤고은의 EBS 북카페>)을 들으며 자란 귤이 떠오르네요. 제주에서 귤 농사를 지으시는 카페인 한 분이 몇 년째 그 귤을 보내주셨거든요. 그때 너무 신기했어요. 귤껍질을 까서 과육을 맛보기도 전에 이미 그 귤을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었달까요. 무엇보다도 귤은 귤이어서, 어쩐지 애틋한 감정을 불러온단 말이죠. 그런 귤이 우리 라디오를 들으면서 자랐다고 생각하니까, 기꺼이 양분이 되리라 싶기도 하고 모든 시간이 향긋하게 느껴졌어요.
염승숙 작가님의 글 중에서 저는 특히, '펑크'를 키워드로 삼은 「파이팅… 파이팅…」이 인상적이었어요. 아이가 "자모음을 익히고 글자를 익히고 글자를 읽어나가는 것과 세발자전거의 안장 위에서 다리를 뻗어 페달을 밟아나가는" 아주 느린 과정을 찬찬히 밟아가며 혼잣말로 "파이팅… 파이팅…" 중얼거리며 기운을 북돋는 장면이 나오죠. 어른이 될수록 스스로에게 관대해지고 친절해지기 참 어려운데, 뭉클한 위로가 되었습니다. 윤고은 작가님은 염승숙 작가님 글 중 어떤 것을 좋아하시나요?
윤고은 : 「등장인물을 떼어내면」도 재미나게 읽었어요. 이 책에 드러난 승숙의 취향 중 대부분은 이미 제가 알고 있었던 것인데, 이 글 속의 승숙은 전혀 새로운 느낌이었거든요. 정확히는 즉석떡볶이를 먹을 때 "맞은편에 앉은 상대방이 떡과 어묵을 다 먹는 것을 기다린다"는 지점에서 흠칫 놀랐는데, 승숙이 볶음밥을 그렇게 고대하는 사람인 줄은 모르고 있었던 거예요. 하긴, 돌아보면 우리가 밥을 먹을 때 승숙이 자주 고른 것도 김치치즈볶음밥이었네요.
볶음밥 취향에 대해서 승숙은 미각이 없는 것이 아닐까, 얘기하지만 무슨 소리! 즉떡의 세계에서 볶음밥은 화룡점정이잖아요. 그리고 제 주변에는 이상하게도 떡볶이나 닭갈비 후에 따라오는 그 옵션-볶음밥을 좋아하는 친구들이 많답니다. 승숙을 위해 제가 앞으로 떡과 어묵을 얼른 다 먹을게요. 그리고 「에필로그」를 읽으면서는 뭉클, 눈물이 솟았어요. 그 작은 지면 안에 우리가 함께 공감하고 고민하며 지나온 시간이 모두 있더라고요.
윤고은 작가님 글 중에서는 '차'를 키워드로 삼은 글 「우리의 쇼윈도 관계」를 특히 재밌게 읽었어요. 마감일을 앞둔 작가의 내적 혼란과 "책상 위는 언제나 사건 현장"이라는 대목도 작가의 작업에 품는 낭만을 현실적으로 깨주었거든요. '일'이란 그런 법이지! 하며 많이 웃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문학 작품 곳곳에서 근사하게 묘사된 홍차(를 마시는 장면) 때문에, 작가님 표현을 빌리자면 '홍차 점조직' 때문에 홍차(와 도구)도 잃지 못한다는 대목도 완전히 공감했습니다. 상상력을 자극하는 표현들을 정말 잘 쓰시는 것 같아요. 염승숙 작가님은 어떤 꼭지를 특히 좋아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염승숙 : 말씀해주신 대목들 저도 다 좋아하는데요, 말씀해주시지 않은 부분 중에서는 「포도 코팅」을 좋아합니다. 포도를 씨까지 통째로 삼키는 걸 상상만 해도 놀라운데, 한 송이를 다 먹는다니요! 위장이 포도로 코팅된다는 표현이 신선하고 재밌어요. 사실은, 책이 출간되고 난 직후에 뭔가를 찾으려고 책상 서랍을 뒤지다가, 오래전에 쓴 노트를 발견했어요. 아주 얇은 두께의 노트라서 금방 다 쓰고 난 후 서랍 어딘가에 박혀(!) 있었던 것 같은데, 펼쳐보니 이 년 전쯤에 쓴 거였고, 어느 날엔 이런 낙서 같은 일기가 적혀 있더라고요. "언니는 걷고 나는 멈춰 있다. 덩달아 집안을 돌아다니며 통화함. 뭐 좀 먹었어요, 언니? 물었더니 어, 난 뭐 먹었냐면 눈뜨자마자 포도 먹었구…" 윤고은 작가님이 라디오 출근길에 전화를 걸어온 모양인데, 그걸 또 메모해놓은 걸 보니 윤 작가님의 포도 사랑은 오래되었구나, 새삼 생각했습니다.
이 책에 못다 쓴, 최근에 발견한 좋은 마감식이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꼭 마감식이 아니더라도 최근에 즐기는 음식이 있다면 그 또한 좋습니다!
염승숙 : 책에는 쓰지 못했는데, 집 근처에 대만 음식점들이 곳곳에 있어서 자주 들르거든요. 중요한 마감을 끝냈다든가, 멀리서 손님이 오시면 대만 음식점에 가서 맥주도 한잔합니다. 가지튀김과 고기튀김 반반이 좋아요.(웃음) 고추 기름을 뺀 우육면이라든가, 우리나라식으로 치면 돼지고기 장조림 같은 것이 밥 위에 얹어져 나오는 루로우판 같은 메뉴는 아이도 잘 먹을 수 있어서 더 좋고요.
윤고은 : 두유와 초콜릿. 보다 정확히 말하면 '약콩두유'와 한입 깨물면 외피 안에 뭔가가 들어 있음을 확인하게 되는 스타일의 초콜릿이요. 그 둘도 제게는 중요한 마감식이에요. 두유는 라디오 스튜디오에서 마시는데, 제가 점심시간대 방송을 진행하다 보니 두유가 거의 점심식사 역할을 해요. 솔직히 저는 두유를 맛있다고 느낀 적이 거의 없지만, 방송과 방송 사이에 후루룩 마시기에 이만큼 무난한 게 또 없어서 자주 마시게 됐어요. 소설가 H가 식사 대용으로 마시라고 추천해준 약콩두유 링크 하나가 시작점이 되어서 그 후로 꾸준히 섭취하고 있답니다. 일종의 습관처럼요. 저뿐 아니라 제작진도 함께 마시고, 우리는 그렇게 단체로 뼈가 건강해지는 중이에요.
초콜릿은 소설 쓸 때 자주 찾게 되는 간식이죠. 한입 깨물면 헤이즐넛 크림이 나오기도 하고, 또 한입 깨물면 오렌지잼이 나오기도 하고, 그렇게 속을 짐작할 수 없는 초콜릿 형태를 특히 좋아해요. 단지 속을 짐작할 수 없어서는 아니고, 이런 초콜릿은 개체 별로 헤아리기가 명확하고, 비싸기도 하니 한 번에 다 먹어버리지 않고 절제하는 데 도움이 돼요. 판 형태로 된 초콜릿은 힘들어요. 전 그 판을 조각내서 먹는 건 감질나서 못하겠어요. 그렇다고 한 판을 다 먹으면 망한 기분이 들고요.
백수린 작가님의 추천사에도 비슷한 대목이 나오지만 이 책은 작가들의 일상을 다루는 동시에 시행착오를 겪고, 뿌듯함도 느끼며 자기 일을 해나가는 사람이라면 공감할 만한 대목이 참 많습니다. 두 분 모두 십 년 넘게 소설 쓰기를 업으로 해왔는데 지금 두 분께 이 '일'은 어떤 의미를 갖는지 궁금합니다.
윤고은 : 지금 헤아려보니 삶의 3분의 1 정도를 소설 쓰는 사람으로 살아왔네요. 소설 쓰는 시간이 제 인생의 여름 같아요. 언젠가 끝은 오겠지만, 영원히 끝나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게 되는 계절이죠.
염승숙 : 정말 놀랍지만, 소설을 써온 지 벌써 이십 년이 가까워오고 있어요. 이런(?) 미래를 미처 생각해보지 못했다는 것이 지금으로선 참 두려운 마음이 들기도 하는데, 그래도 원고료를 받으며 글을 쓰게 되었으니까 '프로'로서 출퇴근이 없는 글쓰기 노동자로 살아온 것만큼은 부정할 수가 없죠. 글쓰기 자체가 자연스레 '일'이 된 셈이고요. 글쓰기의 특성상, 이름을 걸고 결과물을 내고 있기 때문에 일은 저라는 사람 그 자체예요. 에세이든 소설이든, 계속해서 뭔가를 써나간다는 건 저라는 사람을 드러내는 과정이자 방식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더 빈틈이나 부족함이 없고 싶은데, 그래선지 한편으로는 일을 해나갈수록 더욱 조심스러워져서 시간이 더 많이 소요되고, 체력은 부족해지고 그렇습니다. 이 일을 해나가는 동안에 단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글쓰기 노동을 업으로 삼은 이들의 고료가 적정한 금액으로 지불되었으면 하는 것이죠...(웃음)
두 분께 이 책이 딱 한 권 있다면 어떤 사람에게 선물하고 싶은가요?
염승숙 : 글쎄요, 제가 쓴 책을 건네는 건 언제나 민망하고 부끄러운 일이긴 한데... 제목이 '소설가의 마감식'이니까, 소설가를 꿈꾸며 이제 막 습작을 완성한 분이 계시다면 그분께 드리고 싶네요. 내일은 완성할 거라는 착각이 아닌 '기대'로 매일 충만하시길 바라며.
윤고은 : 어떤 책과 사랑에 빠지면 그 책에 대해 이야기하고 주변에 선물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사람.
이 책을 만나게 될 독자분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려요.
윤고은 : 자세한 얘기는 책으로 해요! 우리 모두 퐁식합시다!
염승숙 : 읽어주신 분들, 읽어주실 분들 모두 감사하다는 말씀을 우선 드리고 싶어요. "작가 위의 독자"라는 말을 제가 자주 하는데요. 그 정도로 독자분들은 작가에게 너무나도 고맙고 소중한 자산 같은 분들이에요. 어디서든 책을 통해 행복하시기를 소망하고, 좋은 날 좋은 기회에 꼭 뵙게 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염승숙 1982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동국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 대학원에서 국어국문학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2005년 <현대문학>에 단편 소설 「뱀꼬리왕쥐」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201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평론 「없는 미래와 굴착기의 속도」가 당선되어 평론가로 등단했다. *윤고은 소설가. 라디오 디제이. 여행자. 지하철 승객. 매일 5분 자전거 라이더. 길에 떨어진 머리끈을 발견하면 꼭 사진으로 남겨야 하는 사람. 책이 산책의 줄임말이라고 믿는 사람. 라디오 <윤고은의 EBS 북카페>를 진행하고 있다. 1980년 서울에서 태어나 동국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2003년 대산대학문학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
추천기사
관련태그: 채널예스, 예스24, 채널특집, 소설가의마감식, 염승숙, 윤고은, 마감식
10,800원(10% + 5%)
12,150원(10% + 5%)
8,400원(0% + 5%)
9,500원(0% + 5%)